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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톨릭의 평화의 기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다
    해외뉴스 2024. 8. 11. 19:11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가르침을 반영한 ‘평화의 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작성된 시점은 오래전이며, 현대 사회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오늘날의 현실에 어떤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면죄부 판매 전문 수도사였던 요한 테첼 모습(사진=위키피디아)

    개인에게 평화의 도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인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 문구는 개인이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중세 시기의 십자군 전쟁을 떠올려보면, 가톨릭 교회는 평화보다는 전쟁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앙을 빙자해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개인에게 평화의 도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교회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진리와 믿음의 이름으로 행해진 교회의 모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이 문구는 매우 이상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역사적 행보는 이와 상반됩니다. 종교 재판(Inquisition) 당시, 교회는 '진리'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실제로는 미움과 다툼, 분열을 조장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교회의 역사와 모순되며,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기도, 피해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이 문구는 자기희생과 이타주의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는 피해자에게 부당한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동안, 교회의 부패와 권력 남용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교황청의 부패와 사치스러운 생활은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피해자들에게 이해와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교회의 과오를 은폐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이상주의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문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이상주의입니다. 특히,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다는 개념은 피해자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 판매를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많은 이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부패와 상업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화의 기도의 메시지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평화의 기도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적 모순과 현실적인 한계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가톨릭 교회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 더욱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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